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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궁금한우리말

맛의 말, 말의 맛

중면과 쫄면의
기묘한 탄생기

  밀의 변신, 아니 밀가루의 변신은 무죄다. 지구인을 먹여 살리는 곡물을 꼽으라면 쌀과 밀을 꼽을 수 있는데 두 곡물은 이용 방법이 서로 다르다. 쌀은 껍질을 벗긴 후 통으로 익혀 먹는데 우리말로는 ‘밥’이라 부른다. 반면에 밀은 통으로 먹는 일은 드물고, 곱게 가루를 낸 뒤 반죽을 하여 빵으로 구워 내거나 국수로 뽑아낸다. 쌀은 음식으로 가공하고 난 뒤에도 알곡의 모습이 어느 정도 유지가 되지만 밀은 가루가 된 뒤 반죽하여 빚고 뽑아내는 것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신을 하게 되니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어느 쪽이든 결국은 각각의 곡물이 가진 특성을 살려 가공하는 것이니 좋고 나쁘고를 논할 문제는 아니다.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으로는 빵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국수 또한 이에 못지않다. 밀가루를 반죽해 어떤 방법으로든 가늘고 긴 형태로 만든 것이 국수인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 온 음식이다. 한자 ‘麵(면)’이 ‘밀가루’를 뜻하기도 하고 ‘국수’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빵을 즐겨 먹지 않았던 동양에서는 밀가루를 주로 국수로 만들어 먹었으니 한자의 뜻도 이리 된 것이다. 오늘날도 ‘면식(麵食)’이라 하면 라면, 짜장면, 짬뽕, 냉면, 파스타, 막국수 등의 음식을 먹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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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의 발달에 따라 오늘날에는 흔하디흔한 음식이 되었지만 본래 국수는 온갖 노력과 기술이 결집되어야 먹을 수 있는 고급 음식이었다. 밀을 희고 고운 가루로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을 반죽해 가늘고 긴 형태로 만드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반죽을 넓게 편 뒤 가늘게 자르기도 하고, 작은 구멍을 통과시켜 뽑아내기도 하고, 잘 늘어나는 성질을 이용해 가늘고 길게 늘이기도 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만들어야 하는 것이 국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특별한 날에 별미로 먹는 음식이 국수였다. 잔치 때 국수로 손님을 대접하다 보니 ‘잔치국수’란 말이 생겨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게다가 가늘고 긴 국수의 특성 때문에 생일잔치 때는 ‘장수’의 의미를 담고, 혼인 잔치 때는 오래도록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기도 했다.

면   특별한 맛에 좋은 의미까지 더해진 음식이지만 집에서 국수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점심 한 끼를 칼국수로 대신하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반죽해 칼로 썰어 끓이기까지 많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하다. 동네에 하나씩밖에 없는 국수틀을 가져다가 반죽을 넣고 매달리기까지 해서 국수를 뽑는 것도 자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던 차에 마음만 먹으면 사 먹을 수 있는 말린 국수가 시장에 나오게 되면서 많은 일손을 덜게 된다. 중국에서 기원했지만 이른 시기에 일본에 전해져 일본이 발전시킨 소면이 그것이다. 19세기 초의 우리 문헌에 ‘왜면(倭麵)’으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소면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이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 물자로 들어온 밀가루가 구하기 쉬워지자 일본의 기술과 기계를 활용해 대량으로 만들어져 퍼져 나가게 된다.

  ‘소면’은 한자로 ‘素麵’이라 쓴다. 한자 ‘素’가 ‘소복(素服)’에 쓰일 때는 ‘희다’는 뜻이 되고 ‘소박(素朴)하다’에 쓰일 때는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수수하다는 뜻이 된다. 일본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이 국수가 흰빛을 띠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소면이라면 고기나 특별한 양념을 넣지 않고 간단한 채소류만 넣은 것을 가리켰다. 꾸밈이 없이 수수한 국수란 의미로 ‘素麵’이라 한 것이다. 이 말이 원재료인 국수 자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국수로 끓인 음식을 뜻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소면이 음식이 아니라 재료로 인식되어 퍼져 나가게 되면서 이름에 대한 엉뚱한 해석이 가해지게 된다. 1mm 내외의 가는 면발에 주목해 ‘素麵’을 ‘小麵’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가는 면이라면 ‘세면(細麵)’이라 해야겠지만 한자와 한자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오해이기도 하다. 설사 이렇게 알고 있더라도 발음은 같고, 한자로 쓸 일도 없기 때문에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면’이 세상에 나오면서 그 오해가 현실에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아마도 식품 회사 직원의 작명일 텐데 소면보다 조금 굵은 굵기의 면이 ‘중면(中麵)’이란 이름으로 출시가 되자 ‘소면’은 강제적으로 ‘小麵’이 되어 버린다. 그 직원을 가르친 국어 선생님의 낯이 뜨거워질 법도 하고, 한자 교육을 소홀히 한 교육 정책에 책임을 돌릴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수를 사는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이름이기도 하다.

  중면은 그 이름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하는 국수이지만 국수 중에는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되었을 국수도 있다. 쫄면이 그것이다. 밀가루가 아닌 전분으로 만든 국수는 질기고 탄력이 있는데 냉면에 주로 쓰인다. 인천의 한 국수 공장에서 냉면에 쓰일 국수를 주문받았는데 직원이 그만 실수로 작은 구멍의 부품 대신 보다 큰 구멍의 부품을 끼우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질긴 면, 마치 고무줄 같아서 이로는 끊기도 어렵다. 당연히 폐기되었어야 하는 이 면이 이웃의 분식집 주인에 의해 새로운 음식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애초부터 굵고 질긴 면을 쓴 것을 부각시킨다. 매콤, 새콤, 달콤한 양념으로 비벼 낸 뒤 양배추와 계란으로 장식을 해서 낸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국수가 탄생한 것이다.

쫄면

  그런데 탄생 과정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름이다. 이미 익숙해진 터라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지만 ‘쫄면’이란 이름은 기존의 조어법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아무래도 ‘쫄깃한 면’의 준말일 텐데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말은 이전에는 없었다. 긴 말을 줄여 짧게 쓰는 것은 흔하지만 ‘쫄깃하다’에서 ‘쫄’을 떼어 낸 뒤 ‘면’과 결합시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고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관습과 어법을 어기고 태어난 이 이름보다 더 나은 이름은 없을 듯하다. 어법에 얽매이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지으라면 ‘질긴 면, 고무줄 면’ 정도의 이름밖에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질기다’ 대신 ‘쫄깃하다’란 말을 선택하고 여기에서 다시 ‘쫄’만 떼어낸 작명자의 실험 정신이 놀랍다. 누가 들어도 그 뜻이 쏙 들어오는 이름이다.

  ‘중면’과 ‘쫄면’을 보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국수로서의 중면은 보다 굵은 면발에 대한 수요에 맞춰 만들어졌다. 그 요구에 맞춰 이름도 ‘중면’이라 지었다. 이 이름을 지은 이가 ‘소면’의 본래 뜻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제품과 그 이름은 세상의 요구와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에 국수로서의 쫄면은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것이니 폐기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음식점 주인의 손끝에서 새로운 음식으로 재탄생했다. 이름 또한 만들어져서는 안 될 이름이지만 지은 이의 통통 튀는 감각과 세상에 없던 어법에 의해 멋진 이름이 선을 보이게 되었다. 국어 선생들이 망설일 만한 문제다. ‘중면’이란 엉뚱한 이름을 만든 이의 무식을 탓하고, 어법을 파괴하고 ‘쫄면’이란 해괴한 이름을 지은 이의 용감함을 탓해야 하는가? 세상의 요구와 맞아떨어지는 이름과 음식의 특성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은 이들을 칭찬해야 하는가?

글_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에서 일부를 추려 내어 다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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